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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1세 올브라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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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 1세 올브라흐트는 1459년 폴란드의 바벨 성에서 태어난 폴란드 국왕이다. 그는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와 엘리자베스 합스부르크의 아들로, 형제들의 헝가리 왕위 계승 실패 이후 폴란드 왕위를 물려받았다. 1492년 즉위 후 양원제 의회를 소집하여 의회 제도를 발전시키고, 크라쿠프 유대인 추방, 마조비아 공국 개입, 몰다비아 원정을 추진했다. 튜턴 기사단과의 분쟁을 겪었으며, 1501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동생 알렉산데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으나, 강력한 왕권 추구는 귀족 세력의 반발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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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1세 올브라흐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얀 알베르트의 바벨 대성당 묘비
왕위폴란드 국왕
통치 기간1492년 8월 27일 – 1501년 6월 17일
대관식1492년 9월 23일
이전 통치자카지미에시 4세
다음 통치자알렉산데르
출생일1459년 12월 27일
출생지크라쿠프, 폴란드 왕국
사망일1501년 6월 17일
사망지토룬, 폴란드 왕국
매장일1501년 7월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왕가야기에우워 왕조
왕조 유형왕조
아버지카지미에시 4세
어머니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종교로마 가톨릭교
기타 정보
폴란드어 이름Jan I Olbracht
직함글로구프 공 (1491년 - 1498년)

2. 초기 생애 (1459년 ~ 1492년)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폴란드 왕태자로서 1487년 코페르즈틴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상대로 승리했다.[1] 1490년 헝가리 귀족들은 라코시 의회에서 얀을 헝가리 왕으로 선언했지만, 그의 형인 보헤미아 왕 울라슬로 2세가 이 결정을 거부하고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카지미에시 4세와 엘리자베스 합스부르크와 그들의 13명의 자녀들, 1506년.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형제들인 알렉산데르와 블라디슬라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얀 1세 올브라흐트는 1459년 12월 27일 폴란드 군주들의 거처였던 바벨 성에서 태어났다.[1] 그는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와 엘리자베스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태어난 13명의 자녀 중 셋째 아들이었다.[2]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공작이자 로마 왕 알베르트 2세의 둘째 딸이자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의 손녀였다.[3] 얀 1세 올브라흐트의 부모는 아들 중 한 명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4] 그리하여 그는 외조부의 이름을 기리고 황제 즉위 후보가 되기를 바라며 세례 때 알베르트라는 두 번째 이름을 받았다.[5]

부계로 얀 1세 올브라흐트는 요가일라의 손자였다.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의 이교도 통치자였으며, 폴란드의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가톨릭교를 받아들여 자신의 백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1386년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가 되었다.[6] 이후 그의 후손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대한 강력한 권리를 주장했다.[7]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처음에는 폴란드와의 연합 형성에 우려를 표했다. 리투아니아 귀족과 소수 민족은 두 나라가 합병되면 주권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8] 폴란드인들 또한 야기에우워 왕조가 기원후 966년 국가 창설 이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선대 통치자 피아스트 왕조와 혈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9] 브와디스와프 2세 사후, 그의 맏아들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의 왕위를, 막내 아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위를 계승했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카지미에시의 가계와 아들들이 두 지위 모두의 잠재적인 후계자가 되었다.[10]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왕위를 계승할 권리는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얻어졌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상속받을 운명은 그의 맏형인 블라디슬라프였다.[14] 그러나 이르지 포데브라디가 인접한 보헤미아 왕국에서 블라디슬라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는 카지미에시 4세가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는 조건이었다.[15] 1471년 이르지 사후 보헤미아 의회는 블라디슬라프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16] 카지미에시 4세의 둘째 아들이자 동명이인인 성 카지미에시는 폴란드의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결핵으로 1484년에 사망했다.[17] 6년 후,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는 얀 1세 올브라흐트를 옹호하는 헝가리 귀족 파벌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8][19]

2. 2. 교육

카지미에시 4세는 아들들이 모두 군주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동등하게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24] 1467년 9월, 얀 드워고시가 얀을 포함한 왕자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25] 드워고시는 왕자들이 교회법에 따라 매우 세심하게 자라도록 했다.[26] 얀과 그의 형제 알렉산데르는 폴란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옛 군주들의 묘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했다.[27] 라틴어, 독일어, 법학, 역사, 수사학, 고전 문학이 엄격한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28] 16세기 정치 작가 스타니스와프 오르제호프스키에 따르면, 얀은 아버지의 권유로 체벌을 받기도 했다.[29]

얀 1세 올브라흐트와 필리포 부오나코르시 칼리마코스의 야행, 얀 마테이코의 그림, 1881년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이자 외교관인 필리포 부오나코르시는 얀의 초기 시절과 통치 기간에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졌다.[30] 그는 여왕 엘리자베스의 요청으로 왕실 고문이자 멘토가 되었다.[31] 부오나코르시는 드워고시보다 더 관대하고 온건한 인물로, 체스, 스포츠,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 관한 고대 연구를 통해 교육 과정을 바꾸었다.[32]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그의 많은 생각과 이론은 얀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예를 들어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고 중앙 정부를 만드는 것 등이었다.[33] 부오나코르시는 더 나아가 귀족을 희생시키면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절대 왕정을 주장했으며, 로마와의 분열을 비밀리에 옹호했다.[34][35] 그는 정치와 외교를 넘어 얀과 친구가 되었고, 1496년 사망할 때까지 얀의 가장 신뢰받는 궁정 인물로 남았다.[36]

3. 즉위와 통치 (1492년 ~ 1501년)

얀 1세의 그라두알레


얀 1세 올브라흐트는 1492년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하자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 이로 인해 동생 알렉산데르가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 연합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폴란드는 국가 재정에 큰 손실을 입었고, 얀 1세는 슈라흐타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얀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를 꿈꿨다. 당시 그의 형 울라슬로 2세헝가리보헤미아 왕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얀 1세는 몰다비아 공국을 속국으로 삼아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려 했다. 1494년 레보차에서 얀 1세, 울라슬로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치체로는 대(對)오스만 원정을 계획했고, 슈테판 3세도 협력했다.

1496년, 얀 1세는 전쟁을 위해 8만 명의 병력을 모았지만, 슈테판 3세가 갈리치아를 침공하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얀 1세가 막내 동생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공위에 앉히려 했기 때문이다. 폴란드군은 스차바 포위에 실패하고, 코즈민 숲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 패배는 슈라흐타들의 불복종 때문이었고, 얀 1세는 수백 명의 슈라흐타의 토지를 몰수했지만, 치세 말기에는 인기를 회복했다.

새로운 독일 기사단 총장 프리드리히 폰 작센이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거부하자, 얀 1세는 무력으로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1501년 얀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얀 1세는 자녀가 없었고, 왕위는 알렉산데르에게 돌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 연합이 다시 성립되었다.

3. 1. 즉위 (1492년)

호로드워 연합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독립적인 의회에서 대공을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 의회는 빌뉴스에서 열렸다.[37] 폴란드 왕관 의회는 폴란드 국왕을 지명해야 했는데, 이 직함은 두 의회 모두의 승인을 받아 선출된 한 사람이 공유할 수 있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죽기 전에 얀이 왕위를 승계하고 알렉산데르 야기에우워가 대공국을 승계하도록 요청했다.[38] 리투아니아의 고위 인사들은 이 제안에 만족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두 국가 간의 개인 연합을 유지하길 원했으며, 처음에는 알렉산데르를 선택했다.[39]

선거 재판소는 1492년 8월 15일 피오트르쿠프 트르부날스키에서 소집되었다.[40] 모인 귀족들은 어떤 후보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얀은 폴란드-오스만 전쟁 (1485–1503) 중 극동의 크림 칸국타타르 부대에 맞서 1487년에 성공적으로 교전한 것이 상당한 결정 요인이었다.[41]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형제에 맞선 헝가리 개입 실패를 지적했다.[42] 얀 알베르트는 지적이기는 했지만 종종 거만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다는 평을 받았다.[43] 그 결과, Tęczyński와 레슈친스키 가문의 유력자들은 지성과 추정되는 순결로 구별되는 얀의 동생 지그문트 1세를 지지했다.[44]

국가 고위 인사들 간의 다툼은 재판소를 특징지었고, 그들의 행동 방침이 결과를 결정했다.[45] 의회에 대한 상당한 위협은 야누시 2세와 그의 형제 콘라트 3세였으며, 그들은 마조비아 공국에서 보낸 1,000명의 강경파 군인들을 호위했다.[46][47] 야누시의 후보 지명은 고대 피아스트 왕조를 폴란드 왕위에 복원하려는 의도를 가진 엄격하게 은밀한 보수파의 지지를 받았다. 즈비그니에프 올레쉬니키는 그 파벌의 일원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었다.[48] 왕대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들 프레데릭 야기에우워를 대신하여 회의를 이끌도록 지명했다.[49]

1492년 얀의 선거에 기여한 프레데릭 야기에우워 추기경의 묘비.


1,600명의 군대가 야누시와 콘라트의 군대가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 대비하여 파견되었다.[50] 한편, 얀은 협상에 몰두했고 루카스 바첸로데를 새로운 바르미아 공 주교로 인정하여 로열 프로이센의 표를 얻으려 했다.[51] 결국, 1492년 8월 27일 귀족들의 함성 속에서 구두 투표로 얀이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포된 것은 프레데릭의 개인적인 개입 덕분이었다.[52][53] 한 전령이 크라쿠프의 시민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이는 시민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봉화 축제를 촉발했다.[54] 그 후 수행원들은 수도로 급히 이동했고, 그곳에서 그는 한 달도 채 안 되어 9월 23일, 병든 상태의 올레쉬니키에 의해 바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55]

얀 알베르트가 국왕이 된 첫 몇 달은 불안정했고 불안으로 얼룩졌다. 마조비아 공작들은 여전히 상당한 위협을 가했고, 당시 폴란드에서 독립했던 마조비아로 인해 그의 통치를 위태롭게 했다.[56] 1492년 12월, 얀은 블라디슬라우스에게 의지하여 공동의 적에 맞서 헝가리와 매우 필요한 군사 동맹을 맺었다.[57] 형제들은 상호 지원을 약속했고 그들의 통치를 훼손하는 모든 반대에 맞서 싸울 것을 맹세했다.[58]

3. 2. 의회 제도 발전 (1493년)

1493년 1월,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피오트르쿠프에서 양원제 의회(세임)를 소집했다.[69] 이는 폴란드 의회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폴란드 국왕은 정부의 지속적인 입법 기구를 설립하기 전, 주권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curia regis''를 소집했다.[64] 얀 알베르트 치세 하에서 ''curia regis''는 점차 폴란드 상원으로 변모했다.[66]

1493년의 세임은 두 개의 회의소로 구성되었으며,[69] 정확한 개회 날짜는 국왕이 1월 13일까지 크라쿠프에 머물렀고, 이후 1월 15일에 소폴란드 귀족이 모인 노비 코르친으로 떠났기 때문에 결정하기 어렵다.[70] 국왕은 3월 2일에 과세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고 3월 3일에 의회를 종료했다.[75]

이러한 의회 제도의 발전은 귀족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루이 1세가 1374년 코시체 특권을 통해 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고,[59] 얀 1세의 아버지인 카지미에시 4세는 1454년 니에샤바 법령을 통해 군주가 행동하기 전에 귀족과 세임니크(지방 의회)의 조언을 구하도록 의무화했다.[62]

3. 3. 크라쿠프 유대인 추방 (1494년 ~ 1495년)

1494년 크라쿠프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얀 1세 올브라흐트는 유대인들을 도시 밖 카지미에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3. 4. 마조비아 개입 (1495년 ~ 1496년)

1495년 야누시 2세 공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형제 콘라트는 마조비아의 성을 요새화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논란이 되고 있는 계승을 확보하려 했다.[88] 그러나 콘라트는 폴란드의 야망을 억제하는 데 실패했다. 얀 1세 올브라흐트는 곧 소규모 병력을 모아 마조비아로 진군하여 이 지역의 주요 주교구인 플로츠크를 점령했다.[89] 프레데릭 추기경은 지역 사제들이 직책을 얻는 것을 막고 얀 루브란스키를 주교로 임명했다.[90] 상황 악화를 두려워한 콘라트는 부하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고, 야기엘로 왕가가 마조비아에 대한 주장을 지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91] 1년 후 콘라트는 피오트르쿠프에서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그곳에서 불복종 혐의로 대부분의 재산과 세습 재산을 박탈당했다.[92]

3. 5. 몰다비아 원정 (1497년 ~ 1499년)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흑해 근처 항구(체타테아 알바와 킬리아)[93][94]를 되찾고, 몰다비아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챔피언이 되기를 열망했다. 그의 주된 목표는 남동생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95] 상황은 폴란드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는 동생 블라디슬라프를 통해 1492년 러시아의 이반 3세와 동맹을 맺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책략에 대응할 수 있었다. 얀 1세는 몰다비아의 종주로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1494년 뢰체 회의에서 폴란드와 헝가리 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치체로 간에 원정의 세부 사항이 조율되었다. 그러나 얀 1세가 지그문트를 옹립하기 위해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를 폐위시키려는 계획은 헝가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96]

1496년 5월, 얀 1세는 다가오는 원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 세금을 인상했다.[97] 그의 개인적인 성전의 진정한 동기는 숨겨졌고, 모든 종교적 측면은 배제되었다.[98] 대신 국가 방위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는 것이 가장 적합한 명분으로 선택되었다.[99] 이 허위 서사는 세금 징수 포고령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100] 1497년 8월, 추기경 프레데리크 야기에우워는 그의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교회 수입의 25%에 해당하는 세금을 요구했다.[101] 같은 해 여름, 얀 1세는 약 80,000명 규모의 군대를 소집했고, 중포병의 지원을 받았다.[102] 슈테판 3세는 얀 1세와 폴란드군이 몰다비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103][104][105] 이반 3세의 지지를 받은 그는 얀 1세의 동생 알렉산더가 원정에 참여하지 않도록 설득했다.[106][107] ''비호비에츠 연대기''에 따르면,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폴란드의 행동을 비난하고 몰다비아 영토에 발을 들여놓기를 거부했다.[108]

얀 1세는 오스만 제국의 도발에 의한 보복 공격을 우려하여 크라쿠프 바르바칸의 건설을 명령했다.


1497년 8월, 폴란드군은 드네스트르 강을 건너 몰다비아를 침공했다.[109] 오스만 술탄은 약 600명 규모의 증원군을 보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예니체리[110][111]로 구성되었으며, 로만에 주둔하고 있던 슈테판의 군대에 합류했다.[112] 얀 1세의 폴란드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그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폴란드 진영에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몰다비아 재상은 폴란드군에게 철수를 설득하려 했지만, 얀 1세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감금했다.[113][114] 9월 24일부터 10월 19일까지 지속된 수체아바 공격의 실패는 얀 1세의 야망을 꺾었다.[115][116] 폴란드군은 몰다비아 군대에 의해 보급선이 차단되었고,[117] 질병으로 고통받아 얀 1세는 병상에 누워야 했다.[118] 블라디슬라프가 약 12,000명의 헝가리 군대를 슈테판을 돕기 위해 파견하면서 수체아바 포위는 해제되었다.[119] 휴전이 체결되었다.[117] 코스민 숲 전투에서 몰다비아군은 빽빽한 숲에서 폴란드군의 중기병이 돌격할 수 없어 후퇴하는 폴란드군을 격파했다.[120][121][122] 이 공격으로 폴란드군은 상당한 사상자를 내고 혼란에 빠졌으며, 위신을 잃었다.[123] 얀 1세는 결국 1499년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슈테판을 봉건제적 종속 관계가 아닌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다.[124]

몰다비아에서의 패배는 타타르족 및 기타 불규칙 부대에 의한 폴란드 영토 침략을 촉발했다. 1498년 7월, 말코초글루 발리 베이의 터키 약탈자들이 포돌리아를 넘어 리비우까지 진격하여 도시 주변을 약탈했다.[125] 얀 1세는 몰다비아나 오스만 제국의 보복 공격을 우려하여 폴란드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 중 하나가 된 크라쿠프 바르바칸을 포함한 새로운 방어 요새의 건설을 명령했다.[126]

3. 6. 튜턴 기사단과의 분쟁 (1499년 ~ 1501년)

작센의 프리드리히가 단장으로 선출된 후, 그는 전임자와 달리 1466년의 토룬 제2차 평화 조약을 무시하고 폴란드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129][130] 1499년,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리는 세임에 참석하라는 얀 1세의 요청을 국내 문제로 인해 불참한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131] 그는 이 문제를 제국 의회에 회부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리드리히가 요청이 있을 경우 폴란드를 돕는 것은 허용했지만,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삼가고 "우호적"이고 "이웃 관계"를 유지하도록 주장했다.[132]

옌제이 모라체프스키에 따르면 얀 1세는 튜턴 기사단에게 다섯 차례에 걸쳐 존경과 복종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133] 막시밀리안 1세가 토룬 조약을 비난하며 제국과 성좌 모두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얀 1세는 중포병을 동원하여 1501년 조약이 처음 체결된 토룬으로 진격했다.[134] 프리드리히는 얀 1세 앞에 나타나라는 최후 통첩을 무시했지만 협상을 위해 대표를 보냈다.[135] 주요 지역 분쟁을 우려한 얀 1세의 매형이자 작센 공작 게오르그는 가톨릭 마이센 주교에게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 간의 중재를 위임했다.[136] 그러나 얀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협상은 중단되었다.[137]

4. 죽음과 유산

얀 1세는 몰다비아 원정으로 인해 심리적 상처를 입고 건강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있다.[138] 1501년 6월 17일 토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은 매독일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질병과 전투 부상도 있었다.[139][140]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6월 29일 크라쿠프로 운구되었고,[141] 심장은 토룬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142]

1501년 7월 28일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비트 슈토스의 아들 스타니스와프 슈토시가 고딕 건축 양식의 붉은 대리석 묘비를 조각했다.[143][144] 1502년부터 1505년까지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가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벽감과 아치길을 만들었는데,[145] 이는 폴란드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 작품이자 폴란드 건축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받는다.[147]

얀 1세의 무덤은 바벨 대성당에 있으며 폴란드에서 르네상스 건축의 첫 번째이자 가장 초기 사례이다.


얀 1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1501년 급사 후 동생인 알렉산데르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다시 동군 연합이 되었다.

5. 개인적인 삶과 평가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학문과 예술을 애호하여 그의 궁정에는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요제프 이그나치 크라셰프스키는 왕의 군국주의와 절대주의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150] 그는 외교에 도움이 되는 언어에 능숙하고 영리한 것으로 알려졌다.[160]

알렉산데르와 달리 얀 1세는 국가 문제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가졌다.[148] 19세기 역사가들은 그를 "용감한 군인이지만 지휘관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149] 그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으나, 귀족 세력의 반발과 외교적 실패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496년, 마을 사람들은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고,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는 폐지되었다.[152] 귀족들은 토지에 묶여 이동하지 않는 농민들과 농노제 기반의 폴바르크라고 불리는 영지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153]

얀 1세는 평생 독신으로 남았다.[155] 그가 사생아를 낳았는지는 불확실하다. 왕이 방탕한 삶을 산 색정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얀은 생전에도 악명 높은 여성 편력가이자 방탕한 사람으로 알려졌다.[156] 마치에이 미에호비타는 그가 "전사처럼 [성적인] 쾌락과 욕망을 탐닉했다"고 썼고,[157] 마르친 크로머는 그의 "육체적이고 애정이 없는 사랑에 대한 고집"을 언급했다.[158] 사적으로 그는 연회, 사냥, 잦은 음주를 즐겼는데, 이것은 연대기 작가들이 그를 주정뱅이로 낙인찍게 했다.[161][162]

6. 가계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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